지난날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에 비추어서 오늘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모습을 살펴볼 때, 우리들의 모습은 너무 부요하고, 너무 세속화 되었고, 너무 정치화되었고, 너무 세력화되었고, 너무 정욕적이고, 너무 현세적이고, 너무 분파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뿌리가 되는 평양대부흥운동과 한국 초대 교회의 여러 가지 특징들 중 세 가지만 살펴본다. 우리 자신을 바로 알고 바로 정립해가기 위해서다.
회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첫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교회와 목회자들의 삶의 기초와 중심이 되는 회개가 무엇인지를 바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모든 죄를 토해내는 처절한 통곡의 회개였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진 진실한 회개였다. 1903년 8월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하아디 목사와 일곱 명의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성경을 공부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결점과 과오와 죄를 고백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선교 사역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조선 사람들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는 죄 고백과 회개의 기도를 드렸는데, 이 회개운동이 곳곳으로 퍼져 나아가던 중 기도의 사람 길선주 조사에 의해 뜨겁게 불붙었다. 1906년 황해도 재령에서 길선주 조사가 부흥회를 인도하는 가운데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그 회개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참고로 길선주는 1901년에 장로, 1902년에 조사, 1907년에 목사가 되었다.) 그 회개는 감정적 흥분에 머문 회개가 아니었다. 적당히 감추는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회개도 아니었다.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크고 작은 무서운 죄악들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모두 토해내는 처절한 통곡의 회개였고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진 진실한 회개였다.
“길선주 장로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길 장로는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고 준엄하게 외쳤다.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했다. 장내는 금세 울음바다가 되었다. 회중들은 온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회중은 은혜의 도가니에 묻혀 교회당을 떠나지 않았다. 죄인 잡으러 왔던 순표가 회개하고, 기독교를 비판하려 왔던 중이 개종하고, 신부가 은혜 받고 감격하여 염주를 길 장로에게 기념으로 주기도 했다.”(<빛을 남긴 믿음의 위인>, 최현 지음, 182쪽)
“그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라고 하면서 지난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가 친구 한 사람이 죽으면서 남은 재산을 잘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유산을 정리하기는 하였으나 그 중의 1백 원은 수고 비조로 인정하여 자기가 소유하였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였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라는 자복 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다.” (<한국기독교인물사>, 김광수 지음, 140~141쪽)
“셋째 날 저녁이었다. 시내 영문 앞에 사는 방은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순포(경찰)였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온갖 죄를 다 자복한다는 말을 들은 그는 거기에서 범죄자를 많이 잡을 수 있겠고 따라서 자기의 실적을 올릴 수 있겠다는 음흉한 생각을 하였다. 그는 그날 저녁 집회에 참석했다. 선생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장내는 고요하고 강단에는 이상한 빛이 조용하게 내려 비치었다. ‘지옥을 취하랴, 천당을 택하랴?’ 하는 제목으로 물질을 도둑한 사람은 잡을 수 있지만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죄는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하였다. 죄 있는 마음은 지옥이요, 죄를 회개한 마음은 천당이다. 선생의 설교 내용에 그의 마음은 찔렸고 마음의 고통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 그대로 감싸둘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는 ‘아이고’ 하는 소리를 지르며 거꾸러졌다. 선생이 설교를 끝내려 하는데 갑자기 그가 일어나면서 ‘선생님, 이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저는 천당에 와서 죄인을 잡으려 했던 방순포 죄인입니다. 어찌하리이까?’ 하고 대성통곡을 했다.” (<영계 길선주>, 길진경 지음, 186~187쪽)
방순경은 패검을 떼어 던지고 교인이 되어 고향 맹산으로 돌아가 맹산교회를 설립했다.
“기도가 계속되자 무겁고 슬픔 마음이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한쪽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울기 시작하였고 이어 모든 청중들이 울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흐느껴 울다가 마루 위에 뒹굴며 고뇌에 찬 모습으로 마루바닥을 두 주먹으로 두들겼다. 우리 집 요리사도 죄를 고백하고는 회중 가운데 주저앉아 나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말씀해주세요. 저 같은 사람도 소망이 있나요? 저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 그러고는 마루바닥에 뒹굴면서 흐느껴 울었다. 고뇌에 찬 비명이었다. 죄를 고백한 후에 이따금씩 모든 청중들이 한 목소리로 통성 기도를 했는데 수백 명의 청중이 함께 모여 드린 이 통성 기도의 감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 장로라는 분이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 ‘나를 용서해줄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시작했는데 ‘아바지, 아바지’ 외에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교회당 지붕이 벗겨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김 장로 곁에 몸을 던지고 흐느껴 울면서 이 전에 결코 한번도 기도해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기도했다.” (<The Korean Pentecost>, William Blair 지음, 71~73쪽)
이와 같은 뜨거운 회개와 눈물의 기도는 생활의 변화로 이어진 진실한 기도였다. 블래어 선교사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시내 곳곳에서 사람들은 이 집, 저 집으로 다니며 과거에 피해를 주었던 사람들을 찾아가 잘못을 빌었으며,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이교도들에게도 훔친 물건과 돈을 돌려주느라 시내는 온통 술렁거렸다. 한 중국 상인은 어떤 기독교인이 들어와 수 년 전 그에게서 부당 이익을 취하여 모은 것이라며 거금을 되돌려주는 것을 받고 깜짝 놀랐다.” (<The Korean Pentecost>, William Blair 지음, 71쪽)
성경공부와 기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둘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교회와 목회자들의 삶의 기초와 중심이 되는 성경 공부와 기도가 무엇인지를 바로 보여주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성경 공부와 기도를 하면서 시작한 부흥운동이었고 성경 공부와 기도로 이어진 부흥운동이었다.
1903년 8월 원산에서 시작된 회개운동과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회개운동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성경 공부와 기도로 시작된 것이었다. 1906년 8월에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평양에 모여 한 주간 동안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의 인도자가 로버트 하아디 선교사였다. 그들은 요한일서를 공부했는데 성경 공부에 몰두해서 교제 시간이나 휴식 시간도 갖지 못할 정도였다. 또한 지방 교회의 대표자들이 신년 성경 공부 모임(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한자리에 모이곤 했다. 1907년 신년 사경회에는 1500여 명의 신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 (사경회)을 가졌는데, 이 사경회 중에 회개운동과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지나친 광신적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경 공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인 길선주 목사가 얼마나 철두철미 말씀과 기도 중심의 사람이었는지를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성경과 기도를 거의 무시하거나 멸시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선생은 전보다 갑절의 정열을 기울여 기독교 진리 탐구에 쏟았다. 그는 기도와 성경의 사람이었다. 선생은 기독교에 입신하면서부터 조사가 되기까지 신·구약 성서 전권을 이미 스무 번쯤을 통독하였고 타락한 인류를 속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중심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의 그 심오한 뜻을 터득하였다. 먼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직접적으로 예시한 구약의 대·소선지서, 시편, 신약의 복음서, 로마서, 요한서신 등을 개별적으로 50번쯤을 독파하여 중요한 부분은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다. 아침 5시 또는 밤 10시로 일정한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면서 수시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성경 연구할 때는 시간을 잊어버릴 만큼 열중하여 기도실에 들어간 뒤로는 시간을 알려주어야만 했다. 심혈을 기울여 땀을 흘려 기도하였는데, 금식 기도와 철야 기도는 선생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선생은 성경 연구의 심오한 진리에 도취되었고 성경 해석에 있어서는 정통 분야의 일가를 이루었다.”(<영계 길선주>, 길진경 지음, 122~3쪽)
“매일 한 시간의 보통 기도와 매주 사흘씩 금식 기도와 매년 1주일간의 금식 대 기도를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성경을 매일 한 시간씩 읽고 외우려고 힘쓰셨고 성경 연구와 집필에 하루 평균 세 시간,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두 시간의 독서를 계속하였다. 일생을 통해 구약 전권을 30회 창세기와 에스더와 이사야서는 540회 신약 전권은 100회, 묵시록은 만 독, 요한 서신은 500회를 독파하였다. (<영계 길선주>, 길진경 지음, 181~2쪽)
길선주 목사는 매일 새벽 기도 후에는 항상 약 20분 동안 요한 계시록을 암송했다. 그리고 그가 부흥 사경회를 인도할 때는 언제나 아침 시간에는 요한계시록을 강해하였는데 이것이 한국교회 부흥 사경회의 하나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는 길선주 목사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새벽 기도로부터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평양대부흥운동은 새벽 기도와 철야 기도를 한국교회의 기도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여러 지역을 수 년 동안 두루 방문한 미국의 한 전도자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기도 생활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강하고 단순한 믿음으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여 기독교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한다. 지난겨울 송도에서 몇몇 부흥 집회 기간 동안 거기 모인 사람들이 저녁 집회 후에 산으로 올라가 얼음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하는 모습은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재령에서는 매일 아침 5시 30분이면 몇몇 교인들이 선교사의 집에 찾아왔는데 나도 그들과 함께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평양에서는 길 목사와 한 장로에게 매일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자기들도 함께 모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길 목사는 원하는 사람은 며칠간 오전 4시 30분에 와서 함께 기도해도 좋다고 공표했다. 다음 날 사람들은 오전 1시부터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2시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4시 40분에는 400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L. G. Paik 지음, 377쪽)
복음 전파와 봉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셋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교회와 목회자들의 삶의 열매가 되는 복음 전파와 사랑의 봉사가 무엇인지를 바로 보여주었다. 한국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전국 곳곳은 물론 제주도와 중국과 러시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며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교회로 태어났고 동시에 전도하는 교회로 자라났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로 여겨졌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일어난 부흥운동과 영혼들을 구원하는 전도운동과의 밀접한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부흥운동의 결과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전도 운동이었다. 부흥운동과 전도운동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진행되었다.”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L. G. Paik 지음, 377~378쪽)
“부흥의 결과 전 교회는 깨끗하게 씻겼고 아름다워졌다. 그 해 가을 독립된 한국교회를 조직하기 위해 모였을 때 분쟁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다만 기도하는 것과 한국 전역에, 아니 하나님의 뜻이라면, 중국과 일본에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큰 소원만이 있었다. 새롭게 조직된 한국교회의 첫 모임은 진실로 선교적 모임이었다. 해외 선교부가 조직되었다. 노회는 일곱 사람들을 복음의 사역자들로 안수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유능한 사역자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했다. 선교의 기운이 한국교회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평양 신학교 학생들은 그들 중의 한 학생인 김형차를 이기풍 선교사의 협력자로 제주도로 보내기로 하고 모금을 해서 그를 제주도로 보냈다. 한국교회는 또 한 목사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선교사로 파송했다.”(<The Korean Pentecost>, William Blair 지음, 78~79쪽)
“이기풍은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마포 삼열 목사의 선언에 의하여 우리나라 최초 일곱 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다. 그런데 이때 특이한 것은 노회 셋째 날인 9월 19일 길선주 목사의 사회로 열린 노회가 선교사들의 헌신적 노력에 보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한 사람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한 것이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풍속이나 방언이 다른 외국과 같은 곳이었다.
이때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기로 자원하고 나섰다. 자신도 흑암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1908년에 제주도를 향해 평양을 떠났다. 제주도를 향하던 배가 난파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으나 이기풍 목사는 간신히 헤엄을 쳐서 추자도에 상륙했다. 그 이후 13년 동안의 제주도 복음화 사역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다. 이기풍 목사는 산 속 동굴 안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구렁이를 때려눕힌 일도 있었다.
이기풍 목사의 성공적인 제주도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의 기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 그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었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제주도의 어두운 밤하늘을 밝힌 두 개의 새벽 별들이었다.”(<교회사에 나타난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김명혁 지음, 75~80쪽)
“김익두 목사(1874∼1950년)는 한국교회 초기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주목할 만한 전도자였다. 그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쪽 복음서를 팔았으며,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도록 설득했다. 한때는 해치려고 했던 그 시장 사람들에게 이제는 그리스도를 거듭해서 증거했다. 종종 그는 옛 술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고 그들에게 돌로 맞기도 하였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참아내고, 심지어는 옛 술친구들과 기생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가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하는 자선 사역도 행하였다. 1950년 10월 14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 당하기까지 김익두 목사는 776번의 전도 집회를 인도했으며, 2만 8000회의 설교를 하였고 만 명 이상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봉석 목사(1869∼1944년)도 초기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훌륭한 전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최봉석 목사는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 능력의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북과 만주를 돌면서 전도를 하였고 4년 동안 그곳에 30개의 교회를 새로 개척했다. 1907년 그는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학문보다는 기도와 전도에 몰두했다. 심지어 다른 학생들이 다 공부에 열중하는 시험기간에도 최봉석은 밤에는 기도하고 낮에는 길거리에서 전도를 했다. 그의 증거 방법은 대화를 통해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뜻으로 ‘예수 천당’이라는 두 단어를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최봉석 목사는 만주 땅에서의 14년간의 전도 사역 후에 1926년 평양으로 돌아와 ‘예수 천당’을 외치는 전도를 계속했다. 1938년 한국장로교 총회에서는 강압에 의해 신사 참배를 정당화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최봉석 목사는 이 결의안에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이로 인해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다. 그는 맞을 때마다 ‘예수 천당’을 외쳤고, 이에 놀란 고문관들에게 자기는 그리스도로 꽉 차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맞을 때마다 예수밖에 나올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6년간의 투옥 생활과 고문 끝에 1944년 하늘 집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순교를 통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증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한국교회 쟁점 진단>, 김명혁 지음, 169~172쪽)
한국교회에 제안한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오순절적’ 부흥운동이었고 그 기초와 중심에 처절한 회개와 삶의 변화 그리고 성경과 기도를 지니고 있었고 복음 전파와 사랑의 봉사를 그 열매로 나타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뿌리와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모한다. 우리가 다시 순수한 그 모습을 다시 회복하여 지닐 수 있을까? 필자는 최근에 한국교회의 제 3의 부흥을 사모하면서 결론으로 다음과 같은 제언을 조심스럽게 한 일이 있다. 그것을 간단히 요약하여 실리므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부흥의 도구들로 사용하실 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기도에 깊이 파묻힌 사람, 처절한 회개를 깊이 체험한 사람,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한 사람, 하나님의 음성을 깊이 들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음성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전할 수 있는 사람, 영혼들을 사심 없이 뜨겁게 희생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둘째, 한국교회가 조심하여야 할 점들이 있다. 정치성을 배제하여야 한다. 길선주 목사도 주기철 목사도 정치성을 배제했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흥을 원한다면 정치성을 일부러라도 배제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대중적이고 과시적인 모임을 삼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흥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중적이고 과시적인 모임을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홀로 또는 양무리들을 이끌고 개 교회에서 그리고 묘향산, 금강산, 모란봉, 구덕산, 무학산, 삼각산, 관악산, 주암산 등을 찾아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처절한 회개의 기도와 중보의 기도를 드렸던 발자취를 우리도 따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모두 기도와 회개와 말씀과 교제와 삶의 변화와 사랑의 봉사를 추구하고 사모하면서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실 제3의 부흥을 사모하며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제3의 부흥을 주시옵소서!”
김명혁/ 강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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